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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떻게 살 것인가 - 유시민
    책 이야기 2019. 6. 13. 23:56

    나는 열정이 있는 삶을 원한다. 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고 싶다. 자유롭게, 그리고 떳떳하게 살고 싶다. 인생이라는 짧은 여행의 마지막 여정까지, 그렇게 철이 덜 난 그대로 걸어가고 싶다.

    내 삶에 단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나는 이런 내가 좋다. 자유로움과 열정, 설렘과 기쁨이 없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제1장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이든 좋아하는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나는 그것이 품위 있는 인생, 존엄한 삶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고, 그 삶을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아 간다. 이것이 훌륭한 삶이다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을 물질이나 지위, 사회 통념이나 타인의 시선, 어떤 이념이나 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두었다. 마음이 내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면서 행복한 삶을 스스로 설계했다. 그리고 그 삶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밀고 나갔다. 주눅 들지 않고 세상과 부딪쳤다. 인생이 성공했으며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계속 그렇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고 싶다고 한다.

    평범해도 평범하지 않아도, 인생은 훌륭하거나 비천할 수 있다. 인생의 품격은 평범함이나 비범함과 상관없는 것이다. 문제는 꿈이 없다는 것이다. 인생을 어떤 색조로 꾸미고 싶다는 소망이 없다. 그저 현실에 잘 적응했을 뿐이다.

    내 마음이 가는대로 살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데 보탬이 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내 자신도 더 훌륭해져야 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존 스튜어트 밀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인생 전체가 의미 있으려면, 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이 기쁨과 즐거움, 보람과 황홀함으로 충만해야 한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삶은 훌륭할 수 없다.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카뮈 - 1957 노벨문학상 수락 연설

    --- 루이 제르밍에게 헌정, 교사란 직업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준다.

    모든 아이들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하는 '보통 교육'은 위대한 제도이다. 처음에는 과격한 혁명가들의 몽상으로 여겨졌지만 결국은 모든 문명국가의 보편적 제도가 되었다.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좁게 보면 연대란 동일한 가치관과 목표를 가진 누군가와 손잡는 것이다. 넓게 보면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삼아 어디인가 함께 속해 있다는 느낌을 나누면서 서로 돕는 것을 의미한다. 연대에 참여하는 것은 일, 놀이, 사랑과 함께 의미 있고, 기쁜 삶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이것 없이는 삶을 완성할 수도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도 없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하고 싶고 내게 기쁨을 주는 일을 찾고, 그 일을 잘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데 청춘의 시간을 쓰자.

    내가 즐거운 일을 하고 싶다. 배우고 깨닫고 사람과 나누는 작업이다. 아내와 아이들, 삶과 세상에 대해 깊은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적은 수의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

    내면에서 솟아나는 욕망을 긍정적으로 표출하면서 살고 싶다.

     

    제2장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나이가 들면 뇌 신경세포인뉴런의 수가 줄어든다. 뉴런 사이의 정보 전달을 돕는 화학 물질 분비도 원활하지 않게 된다. 뇌의 정보처리 능력이 떨어지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둔감해진다. 익숙한 것에 집착한다. 고집을 부리거나 화를 잘 내게 된다.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면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스스로 여전히 건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젊은 마오쩌둥이라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일으키지 않을지도 모른다. 솔제니친, 김지하 시인 등등

    극복할 수 있는 시련과 고통, 스트레스는 해롭지 않다. 사람을 단련한다. 그러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고 도져히 이겨낼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시련은 아이들을 죽인다

    세상은 그대로 있는데 '나'의 존재만 무로 바꿘다는 것, 이것보다 더 처절한 상실이 있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와 문화의 역사는 길게 잡아야 1만 년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역사는 고작 수백 년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정보통신혁명은 수십 년 전에야 시작되었다. 스마트폰의 보급은 겨우 몇 년 전이다.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나는 데는 수십억 년이 걸렸다. 인간은 영장류뿐만 아니라 포유류 일반, 심지어 파충류와도 생물학적으로 무엇인가를 공유한다. 인간의 의식과 행동의 밑바닥에는 현실의 사회제도나 문화양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생물학적 본능이 도사리고 있다. 제도를 바꾸어도 이것은 바뀌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이기심, 독점욕, 질투심, 복수심과 같은 공격적 충동은 그 본능의 일부이다. 한때 지구 표면의 절반을 붉은 깃발로 뒤덮었던 마르크스의 후예들이 인간을 해방하기는 커녕 오히려 인간의 존엄을 파과하는 결과를 남기고 몰락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뇌의 구조는 오래된 도시와 닮았지만, 그 작동 방식을 이해하려면 지하실이 딸린 2층집을 생각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지하실은 뇌간이다. 뇌간은 파충류의 뇌와 비슷하다고 한디. 뇌간은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생명활동을 담당한다. '위가 비면 배가 고파진다. 땀을 흘리면 목이 마르다. 마음먹지 않아도 숨을 쉰다. 돌이 날아오면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다.' 이런 일은 도마뱀도 다 한다. 그러나 도마뱀이 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 도마뱀은 새끼를 다정하게 껴안아 핥아주지 않는다. 먹이를 다른 도마뱀과 나누어 먹지 않는다.

    뇌의 1층은 변연계이다. 변연계는 대뇌피질 아래에서 뇌간을 둘러싸고 있다. 여기에는 방이 여럿 있다. '편도'는 감정을 조절한다. '해마'는 기억을 저장한다. '시상하부'는 호르몬 분비를 조절한다. '기저핵'은 운동을 제어한다. 변연계는 오리너구리 같은 원시포유류 단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변연계는 특히 짝짓기를 할 때 맹활약을 한다.

    뇌의 2층은 대뇌피질이다. 대뇌피질은 교양 있는 지식인의 거실이라고 생각하면 적당할 것이다. 서가에는 세계문학전집이나 최신 베스트셀러가 꽂혀 있다. 대뇌피질은 가장 높이 진화한 고등 포유류의 것이다. 포유류 중에도 침팬지를 비롯한 영장류가 가장 발달한 대뇌피질을 보유하고 있다.

    단어를 물건과 연관 짓고,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며, 과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면서 현재의 삶을 설계하는 고도의 지적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 배로 대뇌피질이다.

     

    자유의지는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임을 인식하면서 원하는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그 삶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밀고나가는 정신의 태도와 능력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철학자 밀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어디 사는 것만 그렇겠는가. 죽는 것 역시 자기 방식대로 죽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유의지를 발현할 때 지켜야 할 규칙 또는 도덕법이 있다. 칸트는 이 규칙을 이성이 내리는 '정언명령'이라 했다.

    첫째,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준칙이라야 한다

    둘째,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존엄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옳게 발현하려면 이 두 가지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제3장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대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평생 해도 즐거울 것 같은 일을 찾는 것이다. 사회의 평판이나 부모님의 기대에 맞추어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유의지를 버리면 삶의 존엄성도 잃어버린다. 스스로 설계한 삶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다. 그 자체가 자기에게 즐거운 일을 직업으로 삼고, 그 일을 적어도 남들만큼은 잘할 준비를 하라. 무슨 일을 하든 사람들과 소통을 잘해야 하니 스스로 글쓰기 훈련을 하라. 중요한 정보의 대부분이 영어로 유통되는 게 현실인 만큼 영어로 듣고 말하는 능력을 충분히 기르는 것이 좋다. 열정을 쏟고 싶은 일을 찾는 사람이라면 그 일을 잘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 역시 즐거운 것이다. 아무런 목표도 세우지 못하고 그저 막연히 스펙만 쌓으려고 한다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수당을 싫어하는 이유는 보수주의가 인간의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대변하고 부추기기 때문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 이기심, 독점욕, 증오, 복수심, 두려움, 간자의 오만, 약자의 굴종 같은 것이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부수주의는 인간의 욕망과 본능 가운데서 가장 원초적인 것에 기반을 둔다. 그래서 어떤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에서나 강력한 보수정치 세력이 존재한다. 보수정당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보수정당을 지지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진보정당은 인간의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것을 대변하고 부추기는 정당이다. 자유, 정의, 나눔, 봉사, 평등, 평화, 생태 보호를 추구하는 것은 진화적으로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대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평생 해도 즐거울 것 같은 일을 찾는 것이다. 사회의 평판이나 부모님의 기대에 맞추어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유의지를 버리면 삶의 존엄성도 잃어버린다. 스스로 설계한 삶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다. 그 자체가 자기에게 즐거운 일을 직업으로 삼고, 그 일을 적어도 남들만큼은 잘 할 준비를 하라. 무슨 일을 하든 사람들과 소통을 잘해야 하니 스스로 글쓰기 훈련을 하라. 중요한 정보는 대부분 영어로 유통되는 게 현실인 만큼 영어로 듣고 말하는 능력을 충분히 기르는 것이 좋다. 열정을 쏟고 싶은 일을 찾은 사람이라면 그 일을 잘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것 역시 즐거울 것이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막연히 스펙만 쌓으려고 한다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영원한 이별에 대한 상상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색깔과 맛을 확인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럴때 사랑는 싹 난 감자처럼 아린 맛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와의 영원한 작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리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정치란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의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일'이다

     

    사랑하면 주고 싶다. 깊이 사랑하면 무엇이든 줄 수 있다. 사람이 무엇이든 아낌없이 주는 대상은 자식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녀에 대해서만큼은 조건 없이 이타적인 게 보통이다. 이것은 살아가려는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 전략일 수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새끼를 끔찍이 아끼고 보호한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자기 자식에 대한 이타 행동은 문명의 산물이 아니라 생물학적 본능임에 분명하다.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무엇이든 주려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주려고 할까? 자기 자신이 원했던 것, 실제로 누려보니 좋았던 것, 그것은 행복한 삶이다.

    부모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한 가지, 그것은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자식에게 다른 것을 바란다면 잘못이다. 자기 결정권을 제약당하거나 빼앗긴 사람의 인생은 행복할 수 없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사람도 자녀에게 행복을 상속해 줄 수는 없다. 행복은 사람이 저마다 느끼는 주관적 만족감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삶에서 기쁨을 느끼고 자기 삶에 만족하여 마음이 흐뭇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언제 이런 흐뭇함을 느끼게 되는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행복을 느낀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행복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지켜보고 격려하면서 필요할 때 적절한 도움을 주는 선에 머물러야 한다.

    만약 자식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두 가지를 자지도록 도와줄 수 있다. 첫째는 행복을 느끼는 능력, 둘째는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가지려면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자녀가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삶의 중요한 문제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리는 능력을 기를 수 없다.

    아이를 사랑해주고 부모 스스로 좋은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양육의 핵심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의도적으로 가르치고 보여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것까지 느끼고 이해한다. 부모의 꿈, 정서, 가치관, 감정, 부모가 외부 환경의 자극에 대응하는 방식, 이 모든 것이 아이의 뇌에 영향을 준다.

    아이를 잘 키우려면 도를 닦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자녀를 사랑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아이들 스스로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설계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어떤 인생을 선택하든 믿고 격려하면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조금 도와주는 것이다. 많이 사랑하고 그 사랑을 최대한 표현함으로써 작은 일에도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많이 사랑하고 그 사랑을 최대한 표현함으로써 작은 일에도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제대로 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나 스스로 인생을 만들어나가는 사람은 아주 작은 일에도 쉽게 행복을 느끼게 된다.

     

    일과 놀이와 사랑만으로 인생을 다 채우지 못한다. 그것만으로 삶의 의미를 온전하게 느끼지 못하며, 그것만으로는 누릴 가치가 있는 행복을 다 누릴 수 없다. 타인의 고통과 기쁨에 공명하면서 함께 사회적 선을 이루어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자연이 우리에게 준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사용해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공감을 바탕으로 사회적 공동선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나는 '연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가 이루어내는 아름답고 유쾌한 변화를 '진보'라고 이해한다.

     

    나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법'을 좋아한다. 생물학적 접근법에 따르면 진보주의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이다. 이러한 의미의 진보주의자는 생물학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또는 덜 자연스러운 생각과 행동을 한다. 생물학적으로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진화가 인간에게 설계해놓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가족과 친척이 아닌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을 자발적으로 내놓는 것은 기나긴 생물학적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새롭게 나타난 행동 방식이다. 이것 역시 진화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혈연 집단에 대해서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동물 행동 일반과 비교하면 새롭고 덜 자연스러운 것임에 분명하다.

     

    현생 인류는 아프리카의 적도 이남 사바나 기후 지역에 처음 출현한 이래 지구 펴면 전체로 퍼져나가면서 150만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렵채집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장구한 세월을 '사바나 시대'라고 하자, 사바나 시대는 겨우 1만년 전에 인간이 농업을 발명하면서 끝이 났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스마트폰과 유튜브의 시대를 살고 있다. 사바나 시대의 생활환경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환경과 근복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변화가 거의 없거나 매우 느렸다. 인간의 몸은 매우 안정적이었던 그 시대의 생활환경에서 생존하는 데 유리하도록 최적화되었다. 문명 발생 이후 인간이 생물학적 대진화를 겪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것은 우리가 수렵채집 시대에 만들어진 몸과 뇌를 가지고 인터넷과 아이패드의 시대를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수많은 다이어는 방법가운데 실컷 먹으면서 감량하는 '구석기 다이어트'라는게 있다. 농업 발명 이전의 식단을 지키는 방법이다. 음식의 열량을 따지지 않는다. 육류, 해산물, 달걀, 과일, 견과류,채소를 마음껏 먹는다. 하지만 곡물, 콩, 감자, 설탕, 전부, 가공식품, 유제품은 먹지 않는다. 실제로 뚜렷한 감량 효과가 있다고 한다. 아이디어는 매우 간단하다. 개별 세포에서 신체 장기까지 몸을 만들고 생명활동을 조율하는 유전자는 사바나 시대에 만들어졌다. 우리 몸의 세포는 사바나 시대 식단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이다. 농업 발명 이후 등장한 탄수화물 중심의 식단은 진화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1만 년은 유전자의 적응과 생물학적 진화가 일어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따라서 날씬하고 건강한 몸을 갖고 싶다면 구석기 시대 조상들이 먹던 것을 그때와 같은 방법으로 먹어야 한다.

    신체 장기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예민한 것이 뇌다. 몸 전체가 그런 것처럼 뇌도 사바나 시대 생활환경에서 생존하는 데 적합하도록 최적화되어 있다. 150명 정도 소규모 종족 집단의 구성원에 대해서 어는 정도 이타적으로 행동하면서 협력했다. 반면 완전히 낯선 개체와 집단은 안전과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배타적 적대적으로 행동했다. '집단 내부에 대한 이타주의'와 '집단 외부에 대한 배타주의'는 동일한 사바나 시대 생존 본능의 양면에 불과하다.

    우리 현대인들도 이 본능에 따라 끝없이 경계선을 긋고 울타리를 세운다. 수렵채집 시대보다 그 울타리가 넓어졌을 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현대인도 수렵채집인과 똑같은 '부족 인간'인 것이다. 혈연의식, 애향심, 동문의식, 애국심은 '집단 내부 이타주의'의 표현이다. 이 본능이 외부에 대해서 적대적인 형태로 표출되면 지역 차별, 학벌주의, 외국인 혐오증, 호전적 침략주의가 된다. 외계 생명체가 지구글 침공하지 않는 한 70억 인류가 모두 하나로 단결하는 경우는 엾을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점

    진보주의는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이라고 이해하면 그 차이를 비교적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진보는 서민복지를 확대하기 위한 부자증세에 찬성하지만 보수는 반대한다. 진보는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와 문화적 다양성을 옹호하지만 보수는 내국인의 이익과 민족문화의 고유성을 중시한다. 진보는 동성애에 대해 너그럽지만 보수는 동성애를 협오한다. 진보는 전쟁에 반대하고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옹호하지만 보수는 부국강병을 좋아하고 외부 위협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선호한다. 진보는 여성과 장애인 등 소수자의 권익 보호를 매우 강조하지만 보수는 덜 그렇다. 진보는 무슨 문제가 있으면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강조하는 반면 보수는 개인과 가족의 책임을 중시한다.

     

    신앙이나 이념은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앙에 대한 관용을 갖추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신념은 삶을 풍요롭고 기쁘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 이념의 도구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다. 빛나야 할 것은 신앙이나 이념이 아니다. 정말 빛나야 할 것은 자연이 준 본성과 욕망을 긍정적으로 표출하고 실현하면서 영위하는 기쁜 삶이다.

     

    정치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사업이다. 스스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강제할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의 신념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의 바탕 위에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쓸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소위 '진리의 정치'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생에도 정치에도 확정된 진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은하와 행성의 생애 주기에 비추어 보면 인간의 삶과 하루살이의 삶은 양적인 차이가 없다. 둘 다 찰나의 시간을 살 뿐이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하루살이는 그것을 모른다.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호모 사피엔스의 특별함이다. 그 특별함을 지성이라고 한다. 삶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 그것을 모르는 삶은 그저 조금 더 길기만 할 뿐 하루살이의 삶과 근복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이름과 업적이 남았기에 그들의 삶은 훌륭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 역이 진실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충실했을 뿐이다. 진리에 대한 호기심, 깨닫는 즐거움, 내면에서 솟구치는 열정, 선을 행하려는 의지를 자기 나름대로 표현하고 실천했다. 그렇게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재능과 행운의 도움을 얻은 극소수만이 위대한 그 무엇을 이루었으며 그와 함께 자기의 이름을 남겼다. 만약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자신이 이룬 것을 만족한다면 그 인생은 이름이 남든 그렇지 않든, 그에 상관없이 훌륭한 인생이다.

     

    칸트의 충고를 기억하자.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훌류한 인생, 행복한 삶은 죽음 너머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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